대구 시민들의 문화 중심지였던 극장들
대구 근대극장의 흥행의 불빛이 꺼진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요즘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도시 곳곳에 자리 잡아 영화를 보는 일이 너무도 익숙합니다. 하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대구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단순한 오락 이상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당시 대구 근대극장은 시민들에게 문화와 유행을 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입니다.
1900년대 초반부터 대구는 교통의 요충지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 예술도 활발히 유입되었습니다. 특히 1920~30년대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대구 시내에 근대식 극장들이 하나둘 세워졌습니다. 대표적으로 부인좌, 대구좌, 만경관 같은 극장이 있었는데, 이들은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을 넘어 공연과 집회, 문화 교류의 장으로 기능했습니다.
극장은 서민부터 지식인까지 모두가 모이는 공간이었고, 최신 영화뿐 아니라 신파극, 연극, 음악 공연까지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담아냈습니다. 지금의 대형 공연장과 영화관이 합쳐진 멀티플렉스의 역할을 이미 그때 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특히 주말이면 극장 앞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신작 영화 포스터를 바라보며 설레는 마음으로 표를 끊던 경험은 당시 대구 시민이라면 누구나 가진 추억이었습니다.
전성기를 이끈 대표 상영관
대구의 극장 문화는 1950~70년대를 거치며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피폐해진 사회에서 사람들은 위로와 즐거움을 영화에서 찾았고, 극장은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중요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만경관(萬景館) : 대구 극장의 대명사라 불렸던 만경관은 1919년에 세워져 1970~80년대까지 대구 영화 문화를 이끈 상징적인 공간이었습니다. 수천 석의 좌석을 갖춘 대규모 시설은 당대 최신식이었으며, 외화 개봉작이 걸리면 표를 구하기조차 힘들었다고 합니다.
부인좌(婦人座) :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부인좌는 이름처럼 여성 관객들에게도 개방적이었던 독특한 극장이었습니다. 신파극과 가무 공연이 자주 열려 대구 시민들의 문화적 갈증을 해소해 주었죠.
대구극장, 오동극장 등 : 시내 한복판에는 다양한 중소 극장들이 모여 있어, 오늘날의 동성로·대구백화점 일대가 당시엔 ‘문화의 거리’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1960~70년대 대구의 젊은이들에게 극장은 단순한 영화 감상 장소가 아니라, 연애와 청춘의 무대였습니다. 데이트 코스로 극장만 한 곳이 없었고, 친구들과 함께 모여 앉아 영화를 본 후 다방이나 분식집으로 향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당시 대구의 극장가는 지금의 CGV나 롯데시네마 못지않게 활기차고 트렌디한 장소였던 셈입니다.
멀티플렉스에 밀려난 그 시절 추억
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대구의 근대극장들을 하나둘 무대 뒤로 퇴장시켰습니다. 1990년대 들어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습니다. 대형 건물 안에 여러 개의 상영관을 갖춘 새로운 형태의 극장은 최신 음향·영상 시설을 갖췄고, 쇼핑과 외식까지 함께 즐길 수 있었습니다.
반면 오래된 대구 극장들은 시설이 낡고 접근성에서도 뒤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객들은 점점 멀티플렉스로 발걸음을 옮겼고, 전통 극장들은 운영난에 빠져 결국 하나둘 문을 닫았습니다. 만경관 역시 2000년대 초반 문을 닫으며 대구 극장 문화의 상징이 사라지는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든 곳이 많지만, 대구의 옛 극장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여전히 특별한 의미로 남아 있습니다. 극장에서 친구들과 손뼉 치며 영화를 보던 기억, 첫사랑과 함께 앉아 가슴 설레던 순간, 무대 위에서 직접 공연을 즐기던 경험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한 세대의 삶을 구성하는 소중한 조각이었습니다.
사라진 극장이 남긴 의미
오늘날 대구는 동성로, 수성구, 북구 일대에 현대식 멀티플렉스가 즐비합니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은 여전히 “그 시절 극장가의 분위기”를 잊지 못합니다. 큰 스크린 앞에서 수백 명이 함께 웃고 울던 경험은 디지털 시대의 개인화된 영화 감상으로는 대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웨이브 같은 OTT 서비스가 대중화되면서 극장을 찾는 발걸음은 더욱 줄어들고 있습니다. 집에서 편안하게 최신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과거처럼 표를 끊고 줄을 서서 입장하던 경험은 점점 낯선 풍경이 되고 있죠. OTT는 영화 소비의 방식을 혁신적으로 바꿨지만, 동시에 극장이 주던 공동체적 체험을 사라지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대구 근대극장의 흥행 불빛은 꺼졌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오래된 사진 속 간판, 당시를 기억하는 어르신들의 이야기, 그리고 도시의 골목 어딘가에 남아 있는 건물의 잔해가 그것입니다. 사라진 극장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대구 시민들의 문화적 추억과 정체성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OTT 서비스로 영화를 보든, 멀티플렉스에서 최신 블록버스터를 즐기든, 그 근원에는 대구 근대극장들이 닦아놓은 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